진술충은 없다. (관법이란 무엇인가?)
- 사주명리학/지지(地支)
- 2024. 9. 13.
안녕하세요.
"안녕, 사주명리"의 현묘입니다.
곧 출간될 제 책 "현묘의 사주강의" 1권 띠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관법이 무엇일까요?
보는 방법 즉,
사주를 보는 하나의 시각(뷰), 일관되고 정제된 틀, 가설을 세울 수 있는 모델링을 의미하죠.
불확실하고 복잡하며 쉽게 변하는 하나의 현상을 분석하고 의미부여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많은 지식이 아닙니다.
주식 유튜브 채널을 몇 년을 시청했다고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습니까?
수많은 요리 레시피를 알고 있다고 해서 훌륭한 요리사가 될 수 있습니까?
사주 용어와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사주를 잘 볼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답은 바로 "NO"죠.
10년을 공부해도 단순히 지식과 경험만 쌓고 있다면, 아마추어일 뿐입니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마주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황하게 펼쳐놓을 수 있는 많은 지식,
어디선가 보고 들은 것을 자기것인양 포장하는 기술,
허장성세와 임시변통능력, (모르면서) 짐짓 모든 걸 알고 있는데 말할 수 없다는 태도가,
가 아니죠.
바로 덜어내고, 정리하고, 버리는 능력입니다.
근원에서 벗어난 것,
모순되는 것,
사후적 해석(결과론적 해석, 끼워맞추기)의 가능성,
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잘라버리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럴때 이론은 앙상해지면서 동시에 단단해 집니다.
이런 태도와 능력으로 일관되게 확립된 하나의 견해를 일컬어 관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전에서 느슨하게 제시된 억부와 격국이 관법이 아니라,
바로 현장에서 사주를 해석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일관된 해석틀, 모델링 방법이 바로 관법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버리고, 진짜 필요한 것만 남겨놓았을 때 비로소 관법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관법은
"지금 스스로가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취사 선택힌 결과로써 남겨진 가설"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관된 해석이라는 목표를 위해 많은 것을 덜어내야 비로소 관법이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 관법을 세우는 과정은 곧 편관의 방식과 흡사합니다.
편관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잘라냄으로써 대의를 달성하는 태도죠.
그래서 편관에는 폭력적, 잔혹함이라는 의미가 부여되고,
더불어 목표를 향한 집념과 강한 결기라는 뜻이 맺힙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 소중한 것을 잘라낼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편관의 리더는 외로운 것이고,
외로우면서도 그 자리를 지킬 수 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수많은 희생의 결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죠.
편관의 리더는 희생당한 사람들, 가치들, 재화들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허함과 외로움을 안은 채 자리를 지켜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법을 세우는 과정은 고통이고, 자기 부정이며, 힘든 가시밭길로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행위입니다.
또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다양한 지식들을 가지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 팔자를 이리저리 해석해서
적당히 잰체하며 살아가는 무리의 눈총과 비난도 감수해야 합니다.
이제
'현묘의 사주강의' 1권의 표지에 쓰인 "관법"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조금 다르게 다가오시죠?
블로그, "안녕, 사주명리"에서는 기존의 명리 이론을 정리하고 소개했다면,
책 '현묘의 사주강의'는 편관남 현묘가 어떻게 스스로의 관법을 정립했는지, 그 과정이 드러납니다.
군더더기를 덜어내며 저만의 길을 갑니다.
그래서 1권부터 쉽게 읽히고 재밌지만, 생소하고, 혹은 불편할수도 있습니다.
이 재밌는 여행 기대되시죠?
현묘의 사주강의와 함께하는 즐거운 여행에 함께 동참해주시기를 권하며,
제가 관법을 세우기 위해 쓰는 사고방식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지장간
지장간이라는 단어 모르는 분 없으실 것입니다.
지지에 어떤 천간이 얼마만큼 포함되어 있는지 정리한 이론입니다.
명리 이론이 자리잡던 아주 초장기부터, 지지는 단일하고 순수한 기운이 아니라 천간이 섞여 들어가 있었다고 인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어떤 지지에 어떤 천간이 얼마만큼 포함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죠.
1000년이상의 시간이 흐르고 송대에 이르자
지지에 담긴 천간의 종류와 비율이 제안되고, 송대와 명대를 지나는 과정에서 연해자평이라는 책으로 정리 수렴됩니다.
지장간 중심의 사주 해석방법은 (일간을 기준으로 놓는 분석법과 더불어) 자평명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당시에는 생소한 이론이었지만, 곧 주류가 되었고
현대에 이르면 명리가 곧 자평 명리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즉 현대의 명리학을 하는 자들이 모두 일간을 기준으로 삼고, 지장간을 이용해 사주해석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장간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천간의 종류뿐만이 아니라 비율입니다.
辰(진토)와 戌(술토)를 예로 들어보면,
辰(진토)와 戌(술토)의 지장간에는 모두 戊(무토)가 들어있는데, 그 지지 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이 戊(무토)를 본기(혹은 정기)라고 부르고,
辰을 일컬어 진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辰(진토)나 戌(술토)안에서 중심적인 역할, 주된 역할은 모두 戊(무토)가 담당하고 나머지 요소들은 부수적인 역할만을 담당한다는 말입니다.
2. 진술충
진술충은 말 그대로 辰(진토)와 戌(술토)가 만나서 서로 충돌한다는 말입니다.
충이라는 말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지만 서로 성격과 역할이 다른 두개의 지지가 만나서 충돌함으로써 변화를 야기한다는 것이 진술충의 의미입니다.
현대에 오면 이 충에 중립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예로부터 충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혹은 토는 창고와 묘지에 해당한다고 보아 충을 통해 그 지지 않에 갇힌 기운이 빠져나온다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묘지와 창고가 충을 통해 열려서 갇혀있던 사행(목, 화, 금, 수)들이 빠져나온다는 창의적인 발상이죠.
다양한 주장을 살펴보면 충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나냐에 대한 의견은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두 기운이 충돌해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전제에는 모두 동의를 합니다.
진술충은 충이라는 말이죠.
3. 모순
자 이제 정리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1번(지장간)도 멋진 이론이고,
2번(진술충)도 멋진 이론입니다.
이 모두를 사주해석에 잘 적용해서 풀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죠.
이 두 이론은 서로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순일까요?
지지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지장간의 본기(정기)입니다.
지지의 이름이, 그 천간이 차지하고 있는 날짜 배분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즉 辰(진토)와 戌(술토)의 주인은 戊(무토)이고,
戊(무토)가 중심을 장악하고 나머지 요소들은 품에 안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진술충 이론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辰(진토)와 戌(술토)가 만나서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죠.
서로 반대편에 있는 지지가 만나니
서로 성격이 다른 지지가 만나니
갈등하고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장간 이론에 따르면
辰(진토)와 戌(술토)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부분보다 비슷한 부분이 훨씬 많습니다.
왜냐하면 지장간의 본기가 戊(무토)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지지에서 제일 중심역할을 하고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戊(무토)를 공유하고 있는데,
서로 다르다구요?
너무 많이 달라서, 상극이라서 심지어 충돌한다구요?
진술충이 충이면, 다른 모든 지지들의 관계는 충을 넘어서서 극충이 아닐까요?
4. 선택
베풀고 살며, 돈도 많이 벌고, 책도 많이 읽고, 가족과 사이도 좋고, 인품을 잃지 않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구요?
둘다 모두 가질 수 있다는 태도는 어린아이들에게만 허용될 뿐입니다.
남들에게만 완벽한 이상(도덕적 완결성)을 강요하는 극단적인 이상주의자들의 현실인식이죠.
또는 이런 인식은 모든 이론을 다 적절히 활용하면서 사주를 풀 수 있다는 마인드를 대변하기도 하죠.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버려야 합니다.
즉 지장간의 자평명리를 선택했다면,
십이지지를 시계방위로 쪼개서 반대편의 간지가 서로 충돌한다는 과거의 인식을 버려야 합니다.
반대로 십이지지를 은유적으로 이해하는 과거의 방식을 선택했다면,
지장간의 자평명리를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일관된 방법으로 사주를 해석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관법이 바로 섭니다.
저는 지장간의 자평명리를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진술충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술충이 좋아서 나빠서가 아니라,
제가 과거의 이론을 무조건 부정하는 신세대라서가 아닙니다.
이 경우에 있어,
지장간의 이론을 따르는 것이 좀더 합리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사주를 해석하는 길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지지의 정기의 위상을 무시하게 되면, 지지의 해석의 가능성이 무한해집니다.)
여러분은 진술충을 부정하는 제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사고 과정이 합리적인가요?
아니면 진술충이 밉고 싫어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가요?
어른이라 함은,
자신의 상황이 모순된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버텨내는 사람이며,
더 나아가 현실적인 길을 가기 하기 위해 마음을 잘라내는 사람이며,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선택과 그에 따른 희생의 결과임을 아는 사람
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현묘의 사주강의'는
모순을 직시하고 팔다리를 잘라서라도 끝을 보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 담긴 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상의 저는 나약한 어린아이이지만, 명리를 하는 현묘는 모순을 직시하는 '어른'이고 싶었거든요.
명리만은 온힘을 다해 어른스럽게 대하고 싶었습니다.
왜냐면,
명리는 진짜이고, 빅띵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