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to be Blue - 쳇 베이커의 사주

"내가 자넬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나?!"

쳇 베이커(chet baker), 미국의 재즈 아티스트 (1929~1988)


"죄송합니다."

"어서, 빨리 약을 주게나. 자네에게 좋은 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계속 기다렸다네. 도대체 그동안 어디서 뭘 한 건가?"

"책의 초고를 마감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핑계가 그럴싸하군. 하지만 나에겐 안통하지. 약을 어디다 빼돌렸지? 그렇지?"

"그 쪽 세계에서도 약이 필요하십니까? 고통받을 일도, 더이상 경쟁할 필요도 없는 곳인데요."

"...왜 약을 하냐는 소리를 살아 생전에 아주 지겹도록 들었는데, 죽어서도 들을 줄은 몰랐구만. 몰라서 그렇지 여기가 약이 더 필요한 곳이야. 갈등과 마찰이 없는 이곳이 얼마나 지겨운지 아나? 살아있을 때는 불안과 공포 때문에 약을 했지만 여기서는 정 반대라네.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싶네. 환희 뒤에 찾아오는 그 나락의 감정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더라도 그 감정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

"결국 살아서나 죽어서나 약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러니까 어서 이리 주게. 어서."


시대를 풍미했던 재즈뮤지션 쳇 베이커는 평생을 마약 중독자로 살았다.

대학 때부터 대마초를 비롯한 마약에 손을 댔으며, 60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헤로인과 코카인에 중독된 삶을 살았다.

쳇과 교류를 맺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의 방탕과 무책임에 실망하고 하나둘 쳇의 곁을 떠났고,

쳇의 주변엔 마약상들과 쳇의 대중적인 인기를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우선 선생님 삶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사주에 대한 말씀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내 삶? 사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얼마전에는 사람들이 내 다큐멘터리 영화도 만들었던데 말이야. 나는 그냥 연주가 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무대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약이 필요했지. 음악은 나에게 기쁨이었지만 또한 불안 그 자체였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약이 필요했지.불안함을 느끼면서 불안을 갈구한다는 것의 의미를 아나?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불안 자체로 들어가는 행위야 나에게 재즈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외로움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것과 같지.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고, 약이 용기를 주는거야. 약을 통해 담담하게 외로움 한 가운데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거지 알겠나?"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고? 흥미로운 사람이군."

"선생님의 생년월일시가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방금 하신 말씀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건지..내가 지금 약에 취한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태어난 순간의 기운이 이겁니다."


"약을 파는 사람인줄 알았더니 동양의 집시였구먼. 알록달록한 색종이에 동양의 문자가 써있군. 일본에서 공연을 했을 때 본적이 있지. 그새 내 점괘를 뽑았나 보군"

"점괘는 아니고, 선생님이 태어나신 순간의 기운을 저렇게 기호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 내 점괘 풀이는 어떤가. 재즈라는 글자라도 쓰여있나?"

"아닙니다. 그것은 아니지만 특이한 점이 있는데, 바로 같은 글자가 두 개 있는 거 보이시죠? 아랫쪽에 있는 검정색 바탕의 글자 말입니다. 그 글자가 이 사주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 비슷하게 생긴 글자가 초록색 상자 옆에 날개처럼 붙어있구먼"

"그 글자는 선생님이 태어난 계절과 시간을 의미합니다. 한 겨울의 한밤 중에 태어나셨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틀 전이지. 내가 태어난 날이.. 밤이었고. 흥미롭구만 계속 이야기해 보게."

"선생님의 사주는 아주 추운 겨울 밤의 바다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달도 뜨지 않은, 아무도 찾지 않는 겨울 밤 바다. 불빛 하나 없고, 파도소리만 잔잔히 들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하고 추운 바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당장이라도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바다. 눈앞에서 큰 파도가 밀려오는지, 저 멀리까지 잔잔한 물결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지 알 수 없는 그런 바다입니다."

"내 삶을 알고 하는 소리로 들리는구만. 달도 뜨지 않은 그 겨울 밤의 바다. 꼭 내 마음과도 같네. 평생 나를 괴롭혀온 화두였지. 내 가능성과 잠재력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았네. 왜냐고? 찾으러 애를 쓰는 순간 큰 파도에 휩쓸려 버릴 것만 같았거든. 어디가 어디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네. 내 마음이 불안 그 자체였고, 나라는 존재 자체가 공포였네. 심연의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말이야.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일이지."


쳇 베이커는 자월 자시에 태어났다.

자월이 가지는 엄청난 음기가 자시에 더해지니, 그 어둠의 깊이는 이루 짐작할 수 없다.

만약 일간이 임수가 아니었다면, 자월의 자시라는 환경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발현되었을지 모르지만, 일간이 임수이기에 수기운의 부정성이 더욱 크게 두드러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시간의 경금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데, 시간의 경금은 화룡정점의 의미가 있다.

이미 수기운의 어둠이 장악한 사주인데, 여기에 슬픈 음악을 틀어놓은 것 같은 효과를 준다.

경금과 자수의 조화가 아주 극단적인 어둠을 불러오는 것이다.


"너무 강한 어둠의 기운을 타고 태어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어둠의 기운이 어찌할 수 없는 우울의 조건을 만들었고, 그 우울이..."

"내 음악의 원천이 되었지. 그 우울이 나야. 내가 곧 우울이고, 그게 내 음악이지. 따로 떼어낼 수가 없네."

"맞습니다. 사주적으로도 음악을 바다로 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겨울밤의 바다는 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음표로 채워져 있는 겁니다."

"음표로 채워진 음악의 바다에서 태어났다? 아주 그럴싸한 해석이군. 그럼 약은 약은 뭔가?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내 평생의 친구 말일세. 저 기호중에 빨간색? 초록색인가?"

"아니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면 약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지! 뭔가?"

"검정색입니다. 음악과 우울, 밤바다가 검정색이듯이, 약도 검정색입니다. 사주적으로는 다 같은 것입니다. 선생님의 음악, 정신세계, 우울, 밤바다, 그리고 약물까지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포에서 탈출하기 위해 약을 하셨다고 하셨죠? 하지만 결국 우울이 약이고, 약이 우울이기 때문에 빠져나올 수가 없었던 겁니다.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자네 말을 들으니 말일세. 나는 그저 우울과 불안이라는 굴레 안에서 쳇바퀴를 돌았던 것 같군. 음악적으로 어느정도의 명성도 얻었고,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나 결국은 가도가도 앞이 보이지 않는 쳇바퀴였어. 어느 순간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는데, 결국 우울과 마약의 제자리로 돌아왔지. "

"일본에서는 어떠셨나요? 그때는 약도 끊으셨다고 들었는데."

"죽기 얼마전에 말이군. 그때는 일본정부의 정책 때문에 약을 구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이상하게 몸과 마음이 편안하더군. 불안하지도 않고, 그냥 좋았어. 일본이라는 곳이. 정돈된 풍경과 단정하고 아기자기한 모든 것들이 좋았네. 공연도 성공적이었지. 참 좋았었는데, 내 몸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네. 이제 막 좋아지려고 했는데...운이 내 편이 아니었나 봐.."


목화의 기운을 간절히 바라는 쳇 베이커의 대운이다.

초중년에 금수의 기운이 너무 강하게 흐르고 있어서 사주의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졌다.

신미대운에 토기운이 작용하기는 하지만, 천간의 신금이 여전히 부담스러운 양상이다.

경오대운의 후반에 쳇 베이커로써는 참으로 반가운 오화의 힘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할 무렵에 일본 공연을 하는데, 연운으로는 정묘년과 병인년에 해당한다.

화기운이 강한 대운에 목화의 기운이 강한 연운이다. 이 시기에 목화의 기운이 강한 나라인 일본과 인연이 닿은 것, 쳇이 비교적 좋은 컨디션으로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것은 강한 목화 기운의 도움 때문이라고 본다.

쳇은 일본 공연을 마치고 다음해에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의 죽음 이후로 쭉 화기운이 들어오는 것이 안타깝다.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젊은시절에 목화의 기운이 흘러들어왔으면 어땠을까...


"아뇨! 운이 선생님 편이 아니라서 오히려 좋았다고 봅니다. 만약 선생님의 운이 좋았다면, 그저 그런 음악가가 되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

"운이 좋았더라면, 남들과 같은 조화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고, 선생님은 대학에서 정식 음악교육을 받은 평범한 백인 뮤지션에 불가했을 것입니다. 소울과 영혼이 없는, 오로지 연주를 잘하는, 음표에 충실한 그저그런 재즈 뮤지션이 되었겠죠. 운이 좋은 사람들이 원래 그런 겁니다. 특출나게 잘하지만 기억에는 남지 않죠."

"고통과 불행으로 가득한 내 삶이 결국 유니크한 나만의 음악을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군. 우울과 슬픔 불안 어찌할 수 없는 공포가 내 가장 큰 무기였다니...."

"그렇습니다. 선생님의 생애를 다룬 영화의 제목 본 투 비 블루(Born to be blue)가 선생님의 삶과 음악, 그리고 사주까지를 모두 말해주고 있어요. 우울의 끝으로 들어가 우울을 음악으로 승화해 낸 음악가, 우울과 한몸이 된 재즈 뮤지션이 바로 선생님입니다."

"난 늘 내 자신을 비관적으로만 바라봤는데, 자네를 통해서 위로가 되는구만. 그렇게 보니 내 삶도 나쁘지만은 않았군. 그런데 자네.."

"네?"

"약은 언제 줄텐가? 시덥잖은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어서 약을 주게나."

"예?! 약은 없구요. 저랑 일본여행이나 한번 가시죠. 우울한 사람들에게는 일본이...."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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